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체르카시]]와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카메네츠 구출]], 그리고 퇴장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062401339_0.jpg]] ▲ 1944년, [[6호 전차 티거|티거]] 부대를 점검하는 만슈타인.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의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이반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협동 포위로 코르순과 체르카시에 제11군단과 제48군단이 포위되었다([[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만슈타인은 재빠른 기동 집단 형성과 대담한 돌파, 무엇보다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 안에 갇힌 '슈팀머만 집단'에 돌파에 호응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으로 아직 온전하지 못한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어버리는 데 성공하고 두 군단을 모두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체르카시에의 기동 예비 투입 때문에 다른 곳에서의 소련군 공세를 막아내기는 더욱 힘들게 되었다. 한편 2월에는 카메네츠-포돌츠크에 있던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A%A4%ED%8C%94%EB%A0%8C%ED%8B%B4_%ED%9B%84%EB%B2%A0|한스발렌틴 후베]]의 제1기갑군을 노린 소련군의 공세로 제1기갑군이 포위당하게 되었다([[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그러나 후베의 적절한 대처와 제1기갑군의 탈출을 거부하는 히틀러와의 논쟁 끝에 만슈타인이 이김으로써 만슈타인은 제1기갑군을 탈출시키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마침내 거듭된 패배로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폴란드]] 국경까지 교묘한 후퇴 작전을 명령하다 현지 사수만을 원하는 히틀러와 크게 갈등하게 되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서서히 후퇴하기보다는 일단 크게 후퇴하여 소련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전선을 축소한 뒤 병력을 재편성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으나 '''정치가'''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44년 3월 30일 만슈타인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클라이스트]]를 불러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 뒤 두 사람을 예비역에 편입시킨다.[* 사실 히틀러는 1943년 말에 이미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와 만슈타인을 위시한 당시의 집단군 사령관들을 해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후임으로는 [[페르디난트 쇠르너]], [[발터 모델]], 한스발렌틴 후베 등을 진급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로 같은 날에 모델은 원수로, 쇠르너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후베는 4월 20일에 제3제국 최고 영예인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다음날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후베 또한 [[집단군사령관]]으로 영전할 예정이었다.] 결국 9월 [[요하네스 프리스너]] 상급대장이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남부집단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로써 만슈타인은 전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직후 병원에 입원하여 [[백내장]]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았고, 실명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히틀러의 해임이 없었더라도 [[병가]]로 현역에서 물러났을 거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43년부터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꾸준히 동부전선 전체의 지휘권과 재량권을 한 사람의 동부전선 총사령관을 임명하여 그에게 결정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대포 1문의 배치마저 간섭하던 히틀러는 무시로 일관했다. 실제로 동부전선 총사령관을 따로 임명할 것은 동부전선의 지휘관들 대부분이 염원했던 바이고, 이들이 총사령관 자리에 만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다는 사실으로도, 만슈타인이 실력적으로는 얼마나 큰 신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독소전쟁]] 자체의 승패를 바꿀 수는 없었더라도 만슈타인의 본래 생각(그리고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을 위시한 독일군 지휘관들의 생각)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말고 전략적 요충지로 전선을 축소시켜 재편성된 기갑 부대를 활용하여 방어에 치중하였더라면 어이없기 짝이 없는 후퇴 불가 현지 사수에 따른 1944년의 엄청난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